영암장과 해남장을 돌며 50년 넘게 생선을 팔고 있다. 영암에서 첫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 해남장에 도착하면 다른 장사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앉아 손님을 맞고 있다. 운전을 못하는 남편과 나는 첫 버스를 타고 서둘러 가지만 벌써 해는 중천이다. 조금 일찍 한글을 배울 수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차로 장을 오갈지도 모를 일이다.
병든 아버지는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세 살 때 돌아가셨다. 15살까지 나는 이름도 없는 고아 ‘천둥이’였다. 동네어른들도 친구들도 모두 나를 천둥이라고 불렀다. 다섯 살 꼬맹이는 밥을 얻어먹는 대신 남의 집 아기를 돌봐야했다. 눈칫밥 먹는 다섯살 애기가 자기보다 더 작은 아기를 업고 심부름을 다녔다. 서러웠던 내 어린시절 풍경이다.
내 모습이 딱했는지 열여섯 되던 해 마을 이장님이 면사무소에 가서 내 이름을 만들어 주셨고,드디어 내게도 호적이 생겼다. 실제 나이보다 4살 늦은 나이로 올려진 호적 이름 서경임. 실상은 그렇게 어설프게 만들어진 이름이지만,생각만 해도 고맙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배우고 싶었다. 남의 집 아기를 업고 있다가 산에 나무하러 가다가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오가는 것을 보면 서러워서 나무 뒤에 숨어 눈물을 훔쳤다. 내 이름이 생겼지만 고맙고 아름다운 내 이름은 남들에 의해 불리고 쓰일 뿐 나는 이름 석 자를 쓸 줄 모르는 세월을 살았다.
19살 같은 처지의 가난한 고아 청년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 3남매를 낳아 길렀다. 숟가락 하나도 없이 시작한 살림에 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생선 장사다.
내가 먹을 밥을 한 입이라도 덜어 자식들 먹이며 키운 금쪽같은 자식 2남 1녀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배우고 싶은 열망은 나이가 들어도 잦아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아줌마가 책가방을 지고 가는 것이 좀 특별해 보여 물었더니 어른들이고 부하는 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목포 제일정보중고등학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부터 벌렁거렸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목포 제일 정보 중 고등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에 입학했다. 영암에서도 한글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지만 나는 꼭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근 일 년 정도 남편을 설득해 함께 평생교육원에 입학했다.
가, 나, 다, 라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익힌 한글로 이제는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쓰고 싶은 것을 쓴다. 칠십 평생을 알고 싶었던 한글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목포에서 영암집까지 오가는 버스 안에서 그날 배운 글자를 외우고 또 외운다. 남들이 볼까 부끄럽기도 하지만 평생을 꿈꿔온 나의 소망을 이제 이루게 되었는데 그만한 부끄러움쯤 아무것도 아니다. 시장에서 장사하고 고단한 몸이지만 밤이면 배운 것을 쓰고 또 쓰며 한글을 익히는 기쁨은 꼭 날개옷을 입고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편지나 문서가 오면 답답해 면사무소나 농협에 가서 사정하곤 했는데 이제는 척척 읽는다. 그 기쁨을 그 누가 알까. 내 마음을 글로 쓰고 싶어 아들딸 며느리 사위에게 편지를 썼다. 자식들도 우리 엄마 대단하다며 좋아했다. 한글이 아직 서툴다고 계속 문해반에서 한글을 공부하려는 학생들도 있지만 나는 일흔네 살, 평생 꿈꾸었던 중학교를 향해 힘차게 나갔다.
올해 3월 2일 78살, 남편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 자 한자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학교 가는 것이 즐겁다. 낮에 장사하고 밤에 숙제하다 보면 시간이 부족하다. 쏟아지는 잠에 머리를 책상에 찧기도 했다. "이 나이에 두려울 것이 뭐 있나 배우려고 왔는데, 틀리면 선생님이 고쳐주겠지.’’하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쓰고 싶은 것을 썼는데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나니 더욱 자신이 생겼다.
팔십을 바라보는 부부가 중학생이 되어 공부한다니 KBS 열린마당에서 출연 요청을 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TV 속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여기저기 TV 본 사람들이 생선 파는 곳을 찾아와 용기가 대단하다고 격려해 주기도 했다. 마치 내가 국회의원이라도 되는 듯 공손하게 인사를 해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다섯 살 꼬맹이가 등에 업고 있던 남의 집 아기 대신 이제는 책가방을 업고 학교에 다닌다. 부실한 허리로 가방 하나 제대로 멜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초라한 내 모습과 달리 마음 밭에는 글자가 열매를 맺어 가 지나무 가지 열 듯 주렁주렁 매달렸다.
배고픔을 때우기 위해 소금 한 입과 물 한 바가지로 배 채우던 그 시절을 보내고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았는데 나의 정원에도 봄이 오고 글자 꽃이 피었다. 한자 영어 컴퓨터 역사 사회 글자 꽃들이 나를 보고 웃는다.
글을 배우고 나니 새로운 소원이 생겼다. 조금 더 공부해서 글자 꽃으로 내 인생 자서전을 만들고 싶다. 이장님이 만들어주신 고맙고 아름다운 내 이름 서경임’. 나는 경임이가 참 좋다.
완도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늦둥이 동생이 태어나서 동생을 돌봐야 했기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친구들이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에 갈 때면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여 친구들과 마주칠까 봐 죄 없이 숨어야 했습니다.
내 나이 24살 착하고 반듯한 직장을 가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1남 2녀의 자녀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던 중 남편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2년간은 병간호를 하고나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장을 찾아 이력서를 쓰던 중 학력란에 초등학교 졸업 외엔 아무것도 쓸 것이 없었습니다. 한 번은 병원에서 건강검진 접수할 사람을 구한다기에 ‘까짓것 전 화만 잘 받으면 되지 학력이 무슨 소용이냐’ 싶어 이력서를 가지 고 용기를 내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사무장이 일을 잘 할 것 같다면서 칭찬과 함께 이력서를 받으며 댁에 가계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라고 하기에 부푼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전화기만 바라보며 한없이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 아 조급한 마음에 전화했습니다. “우리 일이 전산을 겸해야 해서 아주머니는 좀 어려울 것 같으니,다른 일을 알아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뜻이 초라한 이력서로 인한 학력 미달로 거절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니 학력 없는 설움으로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구름은 바람없이 움직일 수 없고,사람은 배움 없이 사회에 나가서 당당할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제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배움의 길을 찾던 중 성인들이 다니는 목포제일중고등학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집이 광주라서 거리상 통학이 어려워 목포에서 방을 얻어 자취하며 못 배웠던 한을 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동안 안 해본 공부를 시작하면서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꾸준히 반복 학습을 통해 한 자 한 자 알아가는 재미도 생겼습니다. 한문 4급 자격증도 따고 영어경시대회도 나갔으며,컴퓨터도 배워서 글도 작성하고 글쓰기대회도 나가서 우수상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우리 학교 개교 60돌 행사에는 목포지역민들이 참여하는 자리에 학생대표로 내가 쓴 시 낭송도 하게 되었습니다. 내게도 이런 장점이 있다는 걸 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과 자식들이 너무 자랑스러워하는데 나의 작은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요즘엔 손자 손녀가 와서 영어공부를 해도 한몫 끼고 싶을 때가 있답니다.
백화점이나 거리에 나가서도 영어로 된 간판을 알아볼 수 있을 때 옛날과 비교되어 마음이 뿌듯하고 TV에 한자나 사자성어가 나오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어 뉴스를 봐도 이해가 잘 됩니다. 자식들도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며 응원합니다. 4 년간의 뿌려진 나의 수고가 아름다운 지식의 열매로 결실하기를 희망하는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도 배움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글쓰기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이야기를 소재로 수필이나 마음을 읽어주는 시를 쓰면서 더 많은 즐거움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이런 나의 꿈을 위해 지금은 대학 원서를 쓰는 중이랍니다.
나의 늦깎이 학창시절을 선물해준 목포제일정보중고등학교가 항 상 마음 깊이 감사함으로 남을 겁니다. 친절하신 선생님과 정다운 학우들 웃고 떠들던 추억도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배움의 뜻이 있으신 분들께 전하고 싶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용기를 내어 배움의 문을 두드리면 자신의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변화를 겪으며 적응해야 하기에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5월, 35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장흥에 직장이 생겨서 2019년에 이사를 했다. 살다 보니 푸른 산 맑은 물의 풍광에 반하고 넉넉한 인심에 매료되었다. 자연이 주는 여유로움과 텃밭 가꾸는 재미 등 행복에 젖어 지내다보니 어느새 귀촌 5년 차 장흥 군민이 되어 있다.
낼모레 칠십의 나이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에서 베풀어주는 여러 가지 교육을 통하여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새로운 정보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각종 관심 분야에 대하여 계속 배우고 있다.
디지털 사회로 진입하면서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나로서는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이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장흥군에서 실시하는 정보화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 교육 과정에 6개월 정도 꾸준히 참여하였다. 그 결과 스마트폰을 활용한 영상제작의 수준이 초보를 조금 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장홍문화원에서 주최하는 2020년 제10회 한국문학특구 포럼 장홍 문학영상 공모전 소식을 접했다. 한 번 도전 해 보자는 다소 모험적인 목표를 갖고, 60대 두 명과 정보화 교육 함께 받은 70대 한 분이 의기투합하여 임무를 나누었다.
2개월여의 자료조사와 현지 촬영,검수, 편집 등의 절차를 거쳤는데 수준도 미흡한데다 처음 해보는 작업 인지라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이를 의식하여 위축될 것이 아니라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여러 날을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머리를 맞대고 노력한 끝에 밤 11시 30분경, 접수마감 시간 30분을 앞두고 겨우 제출할 수 있었다.『아직도 청춘팀』으로 응모하여 뜻밖에도 우수상(부상: 70만원을 받게되어 기뻣고, 무엇보다도 자신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 것이 좋았다.
동참했던 70대의 동료분은 평생에 상을 타본 것이 처음이라며, 자식들의 축하로 더 기쁘고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일이라 하셔서 더 보람이 있었다. 그 후로도 디지털 역량 강화를 위해 시간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에도 제11회 한국문학특구포럼 – 장홍문학영상 공모전에 재도전하였다. 이번에는 『이청준의 눈길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소재를 단순화하고 영상을 짧게하는 대신 소설 속 눈길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과 우리 팀으로서는 상당한 기교를 부리는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 공모하게 되었고,특별상(부상:50만원)을 수상하였다.
또한 2020년 장흥 정착 사례수기 「장흥에 살아본께 어짜요?」 공모전에 「이제 장홍서 쭉 살아불라요」라는 글로 우수상(부상:30만원)을 받는 기쁨도 맛보았다. 2020년 12월부터 한국평생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인성 지도사와 학교폭력 예방상담사 교육과정에 참여 하여 각각 2급과 1급 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심리교육협회에서 실시하는 심리상담사교육과정에도 참여하여 2급과 1급 자격증을 받았다.
2021년 5월에는 사단법인 전남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활동지원사 이론 및 실기교육울 이수하여 수료증을 받았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장애우들을 돌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다. 장흥군으로부터 2021년 5월부터 12월까지 귀농귀촌 동네작가로 위촉받아 귀농귀촌을 홍보하는 역할을 했고, 올해도 재 위촉을 받아 꾸준히 취재활동과 영상제작을 하여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리는 일을 해 오고 있다. 2021년 10월에는 통합의료컨벤션센터에서 주말에만 3개월여 동안 실시된 대한체형관리협회가 운영하는 제1회 힐링코디네이터 과정을 이수하여 수료증을 받았다. 동 프로그램은 현대의학과 한의학, 대체의학을 아우르는 통합의학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우리의 신체 시스템을 이해하고 원초적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힐링프로 그램이어서 유익했다.
2022년 5월 20일에는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서 실시하는 2022년 전라남도 평생학습강사 역량강화 교육(평생학습의 새로운기회,메타버스)도 이수하고 이수증을 받았다. 2022년 9월 7일에는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실시하는 2022년 귀농귀촌 아카데미유형 특화(귀농) 34회 비대면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수료증을 받았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연구하고 배우면서 살아가면 정신 연령도 더 젊어지고 삶도 지루하지 않고 더 보람있을 듯하다. 앞으로도 꾸준히 배우고 노력하면서 살고 싶다. 지금 하고있는 귀농귀촌 동네작가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유튜브, 블로그 등 SNS활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나의 도전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초가을의 선선함이 느껴지는 8월 24일 오늘, 제게는 뜻깊은 날입니다. 코로나 재확산의 영향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후기 학위 수여식’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모하리만큼 도전을 시도했던 그 때가 어제 같은데. 오늘 이렇게 졸업식을 합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해서 졸업까지 포기라는 두 글자가 스물스물 제 가슴에 올라와 사라지기가 여러번 반복되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시작한 치킨업을 하며 배움에 대한 열망 하나로 여수 시민외국어강좌 중국어 기초반에 등록하여 바쁜 일과중에도 틈틈이 책을 보며 재미있게 공부하는 저의 모습이 보기좋다며 남편은‘고기가 물 만난 듯하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습니다.
치킨업과 아이셋을 키워내는 일이 내 삶의 전부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저는 공부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소녀가장으로 자란 큰딸인 저는 학창시절 집안의 어려움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고 가난했던 생활에 보탬을 드려야겠다는 의지로 취직을 했습니다. 입사한 유조선 선박회사에서 통신장으로 일을 하던 남편을 만나고 결혼 후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 부부는 퇴직하고 바로 시장에서 자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수입이지만, 마음선한 남편 덕분에 동생 학비와 부모님의 생활비를 조금씩 도와드리며 생활했었지요. 바쁘고 힘들게 살아오는 동안 내꿈과 내가 좋아하는 취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겨를 없이 종종걸음으로 살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근면 절약이 몸에 베인 덕분에 연년생 아이셋을 무사히 모두 대학을 졸업시키니 각자의 일과 생활에 열중하는 아이들이 고마웠습니다.
조금의 여유를 갖게 될 즈음,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제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하고 싶어한 간절한 공부를 아이들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직접 공부를 하고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마구 뛰었습니다.
그 후, 어느 지인을 통해 평생교육원의 시민외국어강좌가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망설일 틈도 없이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는 그 설레임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학창시절 어머니께서는 대학 보낼 수 없는 경제적 사정을 말씀하시며, 남자동생만 대학을 보내자고 하셨습니다. 제 힘으로 대학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법도 잘 모르는 시절이 생각해 보니 아쉬웠던 순간이였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이해하고 순응해야 했지만, 상처되었던 힘들었던 기억들을 이제 지워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방 들고 길을 나서는 저에게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여수진남경기장 평생교육원을 찾아 간 이 날, 저에게는 평생 가슴에 새겨져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그런 날이 되었습니다. 교실에는 미리 와 계신 몇 분이 앉아 계시고 커다란 칠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제 곁을 지나가시는 선생님께 저는 조용한 목소리로“중국어 ‘중’자도 모르는데 저도 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한 번 해 보세요.”이 말씀을 듣고 가슴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자신감이 고개를 들어 신호를 보냈습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오로지 저만을 위한 시간이 생겼다는게 꿈만 같았습니다. 모르는 걸 배운다는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를 새삼스레 중년이 되어서야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감으로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수업을 놓치기 싫어 결석은 물론 지각도 하지 않고 꾸준하게 배워가던 저는 기초반에서 초급반으로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한단계 한단계 수준이 향상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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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고 수줍어 했던 저에게도 발표에 자신감이 생기고 발표를 하면서 더욱 중국어 수업이 흥미롭고 기대감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수업받는 동안 미처 하지 못할 가게일들을 생각하며 아침 일찍 기상하여 처리하려니 평생교육원 공부를 시작하기 전보다 행동도 빨라지고 부지런해져 가는 제 자신이 대견했습니다.
중국어 실력이 조금씩 향상되어 중급을 마스터 할 즈음, 제 마음안에 자리하고 있던 대학 공부에 대한 꿈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의지만 있으면 일하면서 공부도 충분히 가능한‘한국방송통신대학’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시민외국어강좌를 통해 다져진 실력으로 2017년 2월 ‘한국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과’를 입학하였습니다.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보다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마음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과 수업을 듣고 중국문학과 중국문화에 관련된 서적과 논문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레포트를 쓰고, 시험기간이 되면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나의 실력을 테스트받으며 이렇게 저는 서서히 대학 공부에 익숙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끔은 의지와 다르게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로 몸도 마음도 지쳐 갈등이 생길 때도, 매 학기 광주와 순천을 오가며 시험을 치루는 상황마다 여행이라 여기며 즐거운 마음으로 운전을 담당해 준 남편의 따뜻한 배려를 생각하면서 문제점들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22년 8월 24일 지금‘방송통신대학 후기 학위수여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인해 유튜브를 통한 실시간 비대면 졸업식을 바라보는 저는 치킨집 사장이라는 직함외에 대학 중어중문학과 학사라는 명칭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여수 시민외국어강좌 평생교육원을 처음 방문한 그 날을 저는 복권에 당첨된 날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마음의 힘 자존감과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저 자신에게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더 높은 이상과 꿈에 머뭇거리지 않을 용기도 생겼습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감을 알게 해 주시는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강의는 배움에 갈증이 있던 만학도분들께 삶의 보람을 안겨주는 산소와도 같은 분들이십니다. 저도 이제 저와 같은분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지금까지 배워 쌓인 작은 능력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는 새로운 꿈과 도전이 생겼습니다.
평생교육원 기초반에서 시작한 수업이 대학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기까지의 저의 작은 스토리를 글로 써보았습니다. 추억으로만 간직하였을 저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주시고 기록해서 제출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신 공모전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첩첩산중 골짜기 구례군 간전면 삼산리에서 2남 6녀 중 7번 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엔 교통수단이 귀했다. 우리 마을에서 6km쯤 걸어나와 섬진강에서 줄 나룻배를 타고 동방천에 도착하면 부산〜하동에서 오는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8km를 가야만 구례읍에 중학교가 있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 가정 형편으로는 읍내에 하숙이나 자취방을 구할 수 없어서 나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총명해서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교실 뒤 벽엔 내가 그린 그림, 붓글씨, 글짓기가 붙어 있었고, 운동회 때는 1, 2, 3학년 전체 율동 리더가 되었다. 선생님께서 맞춰 주신 하얀 주름 치마를 입고 교단에 올라가 율동 했을 땐 울엄마 얼마나 흐뭇해 하셨던지……. 슬하에 아들만 두 명이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를 딸처럼 무척 사랑해 주셨고 중학교 진학하지 못했을 때 정말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 딸 교단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교사가 되길 바랬는데…… 그때 그 말씀이 귓전에서 맴돈다.
나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배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아오던 중,40살 되던 어느날 신문광고에 중등 검정고시학원이란 전화번호를 보고 눈이 활짝 띄어 전화를 했다. 며칠 후 어느 남자분이 우리집으로 방문했다. 마침 성경 필사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본인은 신학교 다니고 있다고 하면서 책값 등을 미리 입금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30년 전 몇 십만원을 입금했는데 개강날짜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전화해봤더니 없는번호란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공중전화 청소하면서 힘들게 번 돈을 사기 당하고 그 때 마음의 상처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공부는 또 한참 멀어져가 버렸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최종학력’ 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두근두근 범죄자의 마음이 이럴까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적처럼 퇴근 길에 ‘방송통신중학교 신입생 모집’ 이란 현수막이 눈앞에 보였다. 당장 방송통신 중학교 원서를 제출하려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다가 고향에 계신 오빠께 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부탁드렸다. 우리 오빠는 울면서 목이 멘 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동생, 중학교 진학 못 시킨 것이 오빠 책임이 크다고 항상 미안한 마음이 었는데 정말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마치 졸업장을 받는 것처럼 기뻐하셨다. 원서를 제출하고 혹시 불합격이면 어쩌나 두려움이 밀려 왔지만, 조건은 연장자 순이라니 합격될 것이라고 혼자서 위안을 했었다.
2020년 2월 14일 합격통보를 받고 책가방과 실내화를 준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연초부터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이 찾아와서 입학식도 하지 못하고 한 주, 한 달 미루어지다가 드디어 2020년 6월 13일 꿈에 그리던 중학교에 첫 등교를 하게 되었다. 등교 전날 밤 우리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우리 학우들은 어떤 사연을 갖고 이제 중학교에 왔을까? 나이는 몇 살 쯤이나 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마스크를 착용하고 책가방 메고 실내화 들고,벅찬 가슴으로 첫 등교하던 그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 학우들은 모두가 같은 처지로 만나서인지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다. 교과수업 시간엔 손녀 같은 본교 목포중앙여중 도우미(선배님)들이 옆에 앉아 학습을 도와주기도 했다. 온라인 강의 중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사진을 찍어 아들한테 전송해서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 문제가 기말고사에 나왔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지!
나는 요양보호사로 독거노인을 연중무휴로 돌봐드리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영어 한 단어라도 더 배우기 위해 섬기는 어르신
아침식사를 챙겨드리고 방송중 인터넷수업을 반복해서 듣고 공부한다. 그리고 월요일엔 영어수업, 수요일엔 서예연습을 하려고 복지관으로 또 달려간다. 공부가 정말 재미있고 즐겁다. 아들, 며느리가 열공하는 나를보며,“울엄마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좋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면,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아니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우리의 배움은 끝이 없단다.”
우리 가정엔 손주 3명과 ‘나’까지 중학생이 4명이다. 기말고사 때 누가 1등하는지 실력겨루기를 한다. 우리 손주들도 열심히 공부하지만 나 또한 손주들한테 멋진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더욱 노력하고 있다.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방송중 3학년, 내 나이 70세에 중학교를 졸업한다. 나는 만학도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공부까지 할 것이다. 요양보호사로 어르신과 함께 하다보니 사회복지사를 하고싶다는 꿈이 생겼다. 사회복지학과를 지원하여 독거노인들을 섬기는 사회복지사가 꼭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누린 행복한 만학도의 꿈을 다른 분들도 이루어보라며 친구들에게도 권유한다. 방송통신중 신입생 홍보물을 교회 게시판에도 붙이고 아파트 우편함에도 한 장씩 꽂아 넣으며 내가 누린 이 기쁜 행복을 더 많은 분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해본다. 인생의 후반전에 선택한 만학도 의 길. 70평생 살아왔던 그 어느 순간보다 중학교 생활이 가장 값지고 보람 있고 많은 추억을 쌓아간 행복한 시간이었다. 못다 피운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 학우님들과 함께한 만학도의 길은 정말 축복이고 꽃길이었다.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우리들에게 중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신 방송통신중학교의 모든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누구나 시작은 쉬울 수 있으나, 뚜벅 뚜벅 걸어 마침표를 찍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난 꿈을 향해 계속 걸어갈 것이다.
평생학습의 최고 수혜자는 바로 ‘나’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는 전형적인 80년대 맏딸의 삶을 살았다. 교복을 벗자마자 근무복을 입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문제는 대학 교육을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꿈을 접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유일한 방법은 저렴한 교육비와 근무 시간을 피해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평생학습은 이미 학습을 마치고 다른 학습을 이어가는 사람에게만 열린 기회는 아니다. 나처럼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기회의 장이다.
나는 스물둘의 나이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금융기관의 근무 환경이 열악하지는 않았지만 5년 동안의 교육 기간이 짧지는 않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학습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이겨내고 학업을 마쳤고 학사학위를 받았다. 만약 이런 형태의 평생학습 기회가 없었다면 대학 진학의 기회를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래로 세 명의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처 완성하지 못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퇴사를 결정하고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 박사 과정을 차례로 마치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고 모교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강의도 했으며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내 삶에 대한 비극적 감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내가 당당하게 삶의 주체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출발점을 생각해 보면 항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있다. 따라서 평생학습의 최고 수혜자는 바로 ‘나’이다. 국가가 줄 수 있는 보편 복지의 한 조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로 인해 내 삶을 꾸려나갔고 지금도 그 바탕으로 내 삶을 준비하고 있기에 평생학습의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밖에 없다.
평생학습으로 제2의 인생을 연주한다.
8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20년 학교생활을 마쳤다. 그런데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중,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칠 때 느꼈던 몇 가지 문제점이 생각났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학생들의 언어 능력이 상당히 부족해서 수업이 어려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인을 위해 한국어 교육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문화를 누리고 싶어서 한국에 왔지만, 언어적 한계 때문에 학문 영역으로의 이행이 어려워 보였던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특히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고 싶었다. 다시 대학에 진학해 한국어 교육학을 전공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생교육원에서 학점을 이수하고 평생교육진흥원에서 학점 인정을 받으면 국립국어원에서 한국어교원 자격증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2017년, 드디어 학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학기에 24학점을 수강하겠다는 계획이 너무 무리가 되었다. 2주 안에 강의를 들으면 되지만 다음 강좌가 1주 만에 열리기 때문에 사실 1주에 8과목, 24시간 강의를 들어야 했고 중간고사에 기말고사까지 시험도 이어졌다.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수업을 듣고 실습을 들어야 하는 시점에서 코로나19가 터졌다. 대학에서 시행하는 한국어 수업에서 실습을 마치고 싶었던 나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론보다 실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가정사 때문에 전라남도로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실습을 할 수 있는 마땅한 교육기관도 모르겠고 여전히 코로나19는 기승을 떨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실습을 신청했다. 걱정이 앞섰다. 강의 경력은 많은 편이지만, 한국어 수업 강의는 유아나 초등교육과 비슷한 난이도에 강의 기술이 상당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습 팀원이 멕시코, 호주, 부산 등등 전역에 포진해 있어서 시차를 맞추며 실습을 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도시보다는 인터넷 속도가 늦다는 문제도 있어서 잘 진행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기우였다. 온라인 실습이라 오히려 공간적 한계를 넘어 활발한 실습이 가능했고 팀원 사이에 연대감이 강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까지 자격증 관련 정보나 취업 관련 정보를 공유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평생학습이 단순히 학습적인 요소만 있는 게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상부상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제 곧 한국어교원 2급 자격증을 받는다. 학위도 두 개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자랑스럽고 인생 2막 준비도 평생학습이 이루어 주었다는 점에 감사한다.
평생학습의 패러다임을 바꿔야지.
나는 학문에 초점을 맞춰 평생학습을 했다. 평생 공부만 했다. 그런데 공부가 꼭 학문만은 아니겠지. 지방에 이주해 보니 몸을 움직이는 일이 참 많은데, 나는 몸 움직이는 데는 영 재주가 없다. 주변을 보니 다양한 체험 기회도 많고 장흥군민을 위한 교육 기회도 많다. 남편은 목공 과정을 수강해 멋진 펜을 내게 선물해 줬다. 나는 민화를 배우고 싶은데, 이주한 분 가운데 민화 작가가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기회가 있다면 평생 민화를 배우고 싶다. 선명한 오방색으로 색감의 세계로 빠져보고 싶다. 배우다 포기한 일본어도 계속 이어가고 싶은데 다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진학할까 생각해 본다. 영어는 유튜브를 이용해 실용 회화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싶다. 악기도 하나 다뤄 보면 좋겠는데, 가야금을 가르치는 곳이 있어서 고민 중이다. 부모 세대가 노후를 살아가는 방식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건강한 노년을 위해 여전히 평생학습은 필요하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갖고 건강한 노인이 되고 싶다. 이를 위해 여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평생학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