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Vol.15

진도 유배지 한춤

사단법인 진도한춤보존회(이사장 김해숙, 72)는 39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스라하게 간신히 맥을 이어 온 「진도 유배지 한춤」을 고 김부자 선생의 뒤를 이어 김해숙 이사장의 절치부심으로 이어가고 있다. 진도군이 주최하고 사단법인 진도한춤보존회(이사장 김해숙)가 주관해 지난 7월 16일 오후 3시 진도읍 옥주골문화복지센터 2층에서 김해숙 이사장 외 20명의 회원들이 출연해 김해숙 진도 유배지 한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날 발표회는 박주언 진도문화원장, 김용선 진도예총회장을 비롯해 군민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진도 유배지 한춤[恨舞(한무)] 유래에 대해 민속학자 김미경 문학박사는 “조선 시대 진도로 유배 온 유배자들을 위해 진도 예술인들이 추던 춤을 계승한 것이다. 진도 사람들은 온갖 심리적 압박과 상실감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유배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춤과 노래로 함께 했다. 그때 추던 춤이 오늘날까지 진도에서는 「진도 유배지 한춤」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배지 한춤에 대한 연원을 유추해보면, 진도는 300여명의 유배자가 왔던 곳이다. 그중 대표적인 유배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1534년(20세, 중종 29)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29세 때인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45년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7년(33세, 명종 2) 3월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이배되어 유배생활을 하였다. 진도에서 19년 동안 적거 생활을 하면서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로 불린다.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가 삼 간을 지어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연구하였다. 그가 남긴 1,449수의 시중에는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대부분의 시를 유배지에서 지어 유배 시인으로 통한다. 노수신은 유배 생활 중에 향교 뜰의 유배대(流配臺)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고, 지력산 동쪽 거제에 있는 지씨들의 정원에서 시를 읊으며 거닐었다 한다. 진도 유배지에서 지은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에서 “마침내 깊은 겨울 홀로 지내며, 안거(安居)에서 상유를 보전하리라[兀兀遂深冬(올올수심동), 安居保桑楡(안거보상유)”라고 노래했다. 유배지에서 지은 노수신의 시를 살펴보면,

舍弟自京來會(사제자경래회) 아우가 서울에서 내려와 서로 만나다

三夜魂交洽(삼야혼교흡) 사흘 밤을 꿈에 서로 만났었는데
今晨鵲報新(금신작보신) 오늘 새벽엔 까치가 희소식 전했지
悲歡千里面(비환천리면) 천 리밖 얼굴 보니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驚訝九原身(경아구원신) 다 죽은 이 몸 보곤 놀라고 의아해하네.
坐久方成問(좌구방성문) 한참 앉았다 그제야 소식 물을 제
情多每失陳(정다매실진) 정이 앞서니 순서를 늘 놓치누나
翻思在別日(번사재별일) 회상하건대 서로 헤어져 있는 날엔
消息苦難眞(소식고난진) 진실한 기별 듣기가 가장 어려웠지.

유배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시로 표현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애환(哀歡)과 눈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過海追和唐別駕韻(과해추화당별가운)⑴ 바다를 지나면서 당 별가의 운에 추화하다

檣帆通日本(장범통일본) 배 돛은 일본과 통한 바다를 떠가고
島嶼接耽羅(도서접탐라) 진도의 섬은 탐라도와 연접했는데
漁父滄浪闊(어부창랑활) 물은 어부의 창랑수처럼 광활하고
樵翁灩澦波(초옹염예파) 파도는 초옹의 염예파처럼 거세구나
那嫌夕死速(나혐석사속) 어찌 저녁에 죽는 걸 빠르다 꺼리랴
只覺昨非多(지각작비다) 어제까지의 많은 잘못만 깨달았네.
沽酒斜陽興(고주사양흥) 술 사서 마시고 석양 흥취 일거든
還成蓼蓼歌(환성륙륙가) 다시 육륙가⑵를 이루어 보련다.

天時連瘴癘(천시연장려) 기후는 장기가 서로 연하였는데
地理斷全羅(지리단전라) 땅은 전라도와 서로 단절되었네.
城壓千尋霧(성압천심무) 성은 천길 운무에 덮이어 있고
山浮萬頃波(산부만경파) 산은 만 이랑 물결 위에 떠 있네
哭邊盤鼓雜(곡변반고잡) 통곡 소리엔 반고 소리가 섞이고
叫處促音多(규처촉음다) 외칠 때엔 촉박한 소리가 많구려
異俗吁何怪(이속우하괴) 아 이상한 풍속 어찌 그리 해괴한고
終須採俚歌(종수채리가) 끝내 반드시 이가⑶를 채집해야겠네.

1) 이 시는 저자가 順天(순천)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 移配地(이배지)인 진도로 가면서 지은 것이다.
2) 『詩經(시경)』 「小雅(소아) 蓼莪(육아)」에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이미 부모가 돌아가시어 하늘처럼 끝없는 은덕을 갚을 길이 없기에 부모를 몹시 그리워 하여 부른 노래이다.
3) 俚歌(이가) : .통속적인 천근한 民間(민간) 歌謠(가요)를 말한다. 민간 가요를 채집하여 民情(민정)을 살피겠다는 의미이다.壓(압)이 다른 본에는 隱(은)으로 되어 있다.
소재집 2권 노수신, 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3, 75-77쪽.

위 시는 1547년 무렵 지은 시인데 살펴보면 이가(俚歌))란 시어가 나온다. 통속적인 천근[(淺近):지식이나 생각 따위가 깊지 아니하고 얕다]한 민간 가요를 말한다. 민간 가요를 채집하여 민정(民情)을 살피겠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에도 진도지방에는 민요가 전해져 내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요가 있었다면 춤도 덩달아 전승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고 물리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되풀이되는 유배의 악순환 속에서도 1년 농사를 지으면 3년은 먹을 수 있다는 따뜻하고 기름진 섬, 멀고 먼 남쪽 낙도인 당시의 진도는 유배지로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선택된 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도로 온 관료들은 발령받으면 낙도라 울고 오고, 임지를 다시 받고 떠날 때는 지역의 넉넉한 인심에 또 울고 간다고 했다. 고려시대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군내면 용장리에 터(용장산성)를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양[서울]에서 멀리 있고,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이야말로 유배지로는 더할 수 없는 곳이다.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유배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어갔던 그들의 심경을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휩싸인다. 유배자들은 낙후된 문화 전반(시, 서, 화, 창, 관혼상제 등)을 교화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자면 남화의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은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된 원인은 천재적인 그림 솜씨 때문이었지만,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 선생이 금갑도로 유배된 것을 안 이 고장 출신 문사들과 연소자들이 그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고 교유한 것이 『은파유필(恩波濡筆)』에 기록되어 있다. 진도군수의 청에 의하여 소치(小癡)가 살았던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진도읍 동외리 원동마을에 큰 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때 소년 허백련(許白鍊)도 8살 때 그의 공부방을 찾아가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에게 글을 배운 사람들이 20여 명이나 되었다는 진도군지의 기록이 있다. 진도에서 12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변려문(騈儷文) 등 시문에 뛰어났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또한 소치(小痴)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감화와 영향력이 절대적 조건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허련은 김정희에 의해 선도된 문인화의 사상과 경향을 익히고 실행한 화가로서 김정희의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鴨水以東無此作矣(압수이동무차작의)]”는 극찬은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중일 때는 당시 열악한 교통수단에도 진도에서 머나먼 제주도까지 찾아가 배우고 공경하며 사제의 정을 돈독하게 쌓은 교분은 후세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뚜렷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진도 유배지 한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 구한말까지 천여 년이 흐르는 동안 왕족, 관료, 사대부들이 진도로 300여 명이 유배됐다. 「진도 유배지 한춤」은 그들의 삶의 모습과 한을 누군가에 의해서 춤사위로 남겨진 작품이 실낱같은 희망으로 진도에만 유일하게 이어져 내려온 춤이다.


옥주골문화복지센터 액자에 걸린 삼별초 유배지 춤의 기록을 옮기면,

삼별초 유배지 춤
삼국시대부터 전래 되어온 민중의 춤으로서 항상 흰옷의 단아함과 우아함 그리고 한스런 표정에서 선율이 이루어지는 전통 한국무용으로 삼별초 근거지였던 용장사 인근 마을에서 채록한 농촌 여노인들의 춤사위에서 발굴된 것이다. 주로 무속가에서 전래되어온 가무로서 인생의 죽음을 극락전으로 인도하는 몸짓으로 죽음과 고뇌, 환생하는 희로애락의 가락을 슬픈 부음에 맞추어 살풀이 형식으로 어울림을 한다. 상가에서 전래되어 이어오는 무속의 한춤으로 살아서 고뇌하는 인간사의 모습과 죽음으로 후회하는 생자의 모습, 그리고 죽은 자를 환생하여 만나는 환희의 역동작 몸놀림이 빠른 휘모리 장단에 부음 소리와 함께 가슴에 오는 전율을 느낀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4시까지 옥주골문화복지센터의 대강당에서 김해숙 이사장과 회원들은 춤 동작을 연마한다고 하여 방문하였다. 사전에 연락을 하고 방문하니 연습을 잠시 중단하고 반갑게 맞이하며 김해숙 이사장이 진도 구기자차를 직접 끓여 준다. 진도는 고려시대 자주정신이 깃든 삼별초의 항몽 유적지인데 이 삼별초의 유적지가 있는 군내면 용장성과 지산면 안치 인근 마을 여성들의 춤사위를 채록한 춤이 바로 「진도 유배지 한춤」이라고 설명한다. 춤의 도입부는 그 모습이 느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눈물이 얼룩져 외롭고 고독함으로 애절하게 밀려온다. 낙후된 외로운 섬에서 힘들게 견뎌내는 아픔을 묘사하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공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몸으로 유배자의 한스런 모습을 춤사위로 보여주는 모습에 빨려들어 유배인들의 아픈 삶에 동화되어 가는 듯했다. 춤의 뒷부분은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몸이 되는 상황을 연출하여 흥겹게 끝을 맺는다. 숨죽인 마음이 풀리고 힘찬 박수가 절로 나왔다.


「진도 유배지 한춤」에는 유배자들의 한과 설움을 토해내며 지역민과 함께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지역민들은 그들의 애환을 위로하고 염려하는 간절한 마음이 춤사위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진도는 상실감이 큰 유배지역으로 자리매김되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추슬러야만 했던 삶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가슴으로 이어지는 춤사위와 반주, 구음에 이은 한과 흥이 연행되어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릿하다. 진도군에는 씻김굿, 다시래기,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와 북놀이 등의 무형문화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무형문화재라는 것인데 무형문화재가 무엇인가. 무형문화재는 사람이 중심이다. 사람에 의해서만 계승하는 것이며 유형문화재나 사적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이의 계승을 위해서는 후계자를 양성하는 전수교육이 필수적이다. 군에서는 건물을 매입하여 이렇게 전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연행을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회원들의 노력에 정감이 깊어진다. 문화는 말로만 해서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지역과 한 나라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해숙 이사장은 중년까지는 사업을 하였지만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업도 포기하고 오로지 진도 유배지 한춤의 전수에만 몰두하고 있다. 특히 김해숙 이사장은 자비 삼천만원을 발전기금으로 기탁하여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회원들은 33세부터 78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고 회원 수가 차츰 늘어나고 있다. 「진도 유배지 한춤」의 춤사위를 홀로 연구하다가 12시를 훌쩍 넘기는 때가 허다하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4시까지를 기다리는 회원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박수로 응원한다. 코로나19 펜데믹 시대를 맞아 우리의 전통 춤사위인 「진도 유배지 한춤」을 이처럼 애써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기에 진도 문화예술이 날로 넉넉해지고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것이 아닐까.


<평생학습 스토리기자단 박영관, rgo10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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