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어릴 적에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를 진학하실 수 없으셨기에 서울에 올라가 공장을 전전하셨었다.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에 우리 아버지가 있으셨고, 아버지 품에는 그 책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상고를 졸업하셔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셨지만, 조직 생활에 염증을 느끼셨다. 그로 인해 건강도 안 좋아지셨다. 그런 이유로 두 분은 귀향하시게 되었다. 그 후로 두 분은 고향에서 세월을 보내시며 그런 삶에 익숙해지셨다. 그렇기에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는 다소 부담이 될만한 일이라고, 집안 사정도 대학 생활을 뒷바라지 해주실 정도의 여유는 아니란 사실을 은연중에 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 또한 기술을 배워 근처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를 내게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그런 바람을 이뤄드리진 못했다. 경쟁심이 강했고 욕심도 있던 나는 누군가에게 지기를 싫어했고, 친했던 친구들이 대학에 간다면 나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나의 뜻을 밝히고 집에 있던 작은 창고를 공부방으로 개조하고, 정말로 고등학교 3학년의 대부분을 그 방 안에서 지냈다. 그렇게 하니, 성적은 올랐고 결국 서울대 합격증을 받아들게 되었다.
참 힘든 과정이었지만 결과에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작됐다. 고향에서 서울을 오가는 데는 대략 왕복 9만 원가량이 차비로 쓰였다. 첫 학년에는 기숙사 혜택을 받았지만, 2학년에 어쩔 수 없이 자취하게 되니 보증금과 월세가 몇백, 몇십씩 들었다. 그리고 식비는 왜 이리 많이 드는지, 방값 정도의 돈이 식비로 빠져나갔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까 싶었지만, 부모님이 딱 쓸 만큼만 버신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땐 집이 가까운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내게는 너무나도 부담되는 일들이 그 친구들에게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생활비의 문제뿐이라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대학의 동기들은 정신적으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현실 문제에 끙끙대며 큰 뜻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이 들 때도 많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젊음의 치기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현실을 마주하고 그저 꾹 참을 때의 서러움을 시 한 편만이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고 서울에서의 홀로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있었다. 바로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따뜻한 도움이었다.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기쁘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걱정이 동시에 들어 마음이 복잡했을 때, 해당 진흥원을 알게 되었다. 이제 정말로 독립하겠다는 다짐만을 가지고 막상 아무것도 가진 주춧돌이 없을 때 주신 도움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본인은 진흥원의 장학 제도를 통해 학기당 20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는 근로 장학금으로 계산하면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한 달에 50만 원에 해당하니, 한 달에 60시간을 근로하고 받게 되는 금액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자취하는 학생들이라면 방값을 해결할 수 있는 비용이고, 그렇지 않은 학생이라도 식비를 충당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다.
본인은 이를 통해 첫 학기에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사용할 목돈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고, 실제로 자취를 해야 했을 때 보증금을 모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을 또 하나의 어버이라고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라고 원치 않으셔서 뒷바라지를 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나도 부모님도 서로가 마음 한쪽이 매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선뜻 메꿔주는 역할을 진흥원이 해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는 좀 더 생활에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를 이용해 학업에 투자할 시간을 늘리고, 가끔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를 토대로 생활의 안정감과 행복감을 되찾은 나는 학업에 집중하고 진로를 탐색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씨젠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같은 산업의 단백질 복제약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진로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고향에서 꿈을 키워나가는 후배들이 진흥원의 제도적인 도움을 통해 진로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전남 출신이라면 사회에서 개인들의 발전을 위한 부양책이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자신의 상황이 원하는 꿈을 쫓기에는 여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더라도,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은 개인이 원하는 것이 있고 재능이 어느 정도 있다면 그를 받쳐줄 만한 제도들이 많이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전남인재육성재단에서 핵심 인재 육성 사업으로 시행하고 있는 숨은 인재 발굴 대회가 특히 중고등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보다 고등학생 생활만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충분한 요건을 쌓기가 어려워졌는데, 이러한 제도적 마련으로 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분야에 대한 흥미의 지속성을 유지하며 재능을 발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도 고등학생 3학년 동안 이공계열의 전문가가 되고 싶기에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나 불안감을 가지고 생활했던 기억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최근 들어,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가구 소득 분위가 명문대일수록 높아져 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상위권 대학이 수도권에 몰려있는 특성상, 그런 대학에 도전하는 것은 전남 지역 학생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개인의 가정사나 현실적인 한계들이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은 아마 여전히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그 혜택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지역 후배들이 이러한 혜택을 받고 자신의 꿈을 위해 발돋움할 도움닫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끝으로 나의 또 다른 어버이인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발전과 영광을 바라며 글을 마친다.
안녕하십니까? 2019년 하반기, 2020년 상반기 전남인재육성재단 장성군 장학생 으로 선정된 호남대학교 외식조리과학과에 재학 중인 4학년 박성곤입니다. 현재 조리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요리를 통한 경험들이 다양합니다.
‘Me and Myselves, 멀티 페르소나’
상황마다 여러 개의 자신의 정체성이 있다는 2020년 소비 트렌드 키워드입니다.
저 역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 선생님, 요리사, 대회 선수 등 상황에 따라 저에 대한 새로운 수식어들이 따라옵니다.
대학교에서는 학생, 요리 수업을 할 때는 선생님, 또 현장에서 일할 때는 요리사 및 셰프님, 또 각종 요리대회를 출전할 때는 선수의 명칭이 따라서 오는데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삶의 목표와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도전을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3학년과 현재 재학 중인 4학년 총 2번의 장학생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장학금, 장학생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학생이었습니다.
평점 평균 3점을 겨우 넘는 수준과 한 번의 성적경고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2014년 대학을 와서 처음 요리를 공부하고 학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후 동기들을 둘러보니 00 조리 고등학교, 다수의 자격증, 00대회 금상 등 다양한 스펙들을 가진 동기들이 많았습니다. 요리를 배우고 온 동기들에 비해 저는 이론, 실기 수업을 따라가기 매우 벅찼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남들이 쉴 때도 연습하고 남들이 할 때도 연습하는 방법뿐이 없어서 학교에서 실기 수업이 끝나면 남은 재료들을 모아서 똑같은 요리를 밤새 몇 번의 연습을 하고서 막차가 끊겨 학교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수업 듣고 집에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조리의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수업이 진행되기에 좋은 성적을 받기에는 벅찼고, 나와 적성이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 제대 이후 나의 나쁜 습관, 안 좋은 생각들을 고치기 위해 요리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대회를 출전하고 또 세계요리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하기도 하며 스스로 많이 노력한 탓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복학 이후 저는 줄곧 좋은 성적과 다양한 수상실적 및 대외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쉼 없이 달렸던 저에게는 쉴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학비 마련과 학업을 위한 보조금(용돈)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요리 진로체험 강사로 강의를 하고, 또 방학 때 현장실습을 통해 일을 하여 등록금과 학기 중에 공부를 하기 위해 적정 수준의 용돈을 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강한 채찍질을 하며 꽤 힘들게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사실 등록금을 마련하는 것 중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성적을 받아 학생의 본분을 마땅히 함과 동시에 진로계획 및 비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방학 때 마련한 학비와 용돈으로 학기 중에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찾아보던 중 ‘전남인재육성재단’을 알게 되었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장학금 신청을 하였고 정말 감사하게도 장학생에 선정되었습니다.
때론 금전적인 문제로 끼니를 거르기도 하고 때로는 값싼 밥을 먹으며 참아왔던 나의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생각에 장학생이 선정되었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부족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던 점은 선순환적인 환경으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를 지속해서 이어올 수 있는 점이었습니다.
즉, 장학금을 통해 또 다른 충분한 휴식 여건이 생길 수 있고 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었던 시간은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로 더 벌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매 학기, 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2020년 전남인재육성재단 성적 장학생 지원을 할 당시 4.5만 점의 학점으로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이후 또 한 번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학비를 마련하고 학업을 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덕분에 충분한 학업 시간과 더불어 다양한 대외활동과 요리대회 출전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기에 각종 요리대회 수상을 통해 저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교육부에서 주관하는‘2020년 대한민국 인재상’을 지원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인재상은 매해 고등학생 및 대학생과 청년 총 100명의 국가에서 인정하는 인재를 선발하는 사업입니다. 현재 지역심사를 거쳐 1,2차 심사를 통과하여 중앙심사인 면접만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6년 전 대학을 입학할 당시 대한민국 인재로 선발되어 인재상을 받는 모습을 꿈꿔 왔던 저는 또 한 번의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남인재육성재단의 좋은 장학사업으로 장학생으로 선정된 덕분에 저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더욱 집중하고 준비해 나갈 수 있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을 집중해 어떠한 것을 간절히 소망하면 불가능한 일도 실현된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심리적 효과입니다.
전남인재육성재단의 장학금은 저에게 피그말리온 같은 효과를 심어주었고 또 동시에 나비효과와 같이 새로운 도전을 만들 수 있던 발판이 되었습니다.
전남인재육성재단에서 선정된 장학생으로서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전남을 넘어 대한민국 또 세계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현할 수 있는 인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학생이 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함과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 기회를 빌려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라남도 어느 군의 몇 없는 초중고들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저는 중학교 졸업 전까지만 해도 노래방, 피시방 등 눈 앞의 즐거운 일만 찾는 학생이었습니다. 영어유치원에서 일찍이 영어를 배우고 국영수학원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한다는 또래들의 이야기들은 저와 동떨어진 일이었고, 학원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도 저와 오빠에게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으셨기에 성적 때문에 싸우는 일도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도 친구들과 매일 노래방에 가거나 밤을 새며 게임을 하는 것, 스스로를 예쁘게 꾸미는 것이 제게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었고 공부를 잘해서 인정받는 일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졸업장을 받고 마지막 방학을 보내던 중, 인터넷에서 접한 한 영상이 제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사교육 기업의 대표가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조폭같았던 자신의 중학교 생활, 독기로 공부를 시작한 고1, 힘들어서 책상을 뒤엎기도 했던 고2 겨울방학 시기와 이내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이야기였고 흔하지는 않아도 간간히 찾아볼 수 있는 학창시절 이야기였지만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학창시절이라고 했는데 그에게 20년 가까이 지난 까마득한 학창시절이 그 때까지도 잊지 못할 시기로 남아있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 겪은 경험과 노력이 이후의 삶까지 이어지고 자존감과 자신감에도 매우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사실로 다가오니 새삼 놀라웠고 두려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후, 제 학창시절을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남은 3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나를 시작점에서부터 주저앉히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을 한 순간부터 고등학교 공부법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을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만, 고등학교 공부는 시간 효율성을 따져서 본인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는 전략성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학원이 아닌 공부법에 관한 조언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공부법 코칭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소개영상을 보니 서울대생의 공부법 코칭 프로그램이라는 정보밖에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애매한 성적향상이 아니라 최상위권 성적취득을 위한 공부를 하고자 했던 저는 그들에게 배우고 싶었고 그것이 제가 찾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코칭을 받는 프로그램이지만 온라인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상당한 비용이었고, 저는 그런 학업적 지원을 바라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제가 큰 다짐을 했으니 많은 비용이 들어도 꼭 이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스스로가 철없게 느껴질 만큼, 형편에 비해 큰 비용이라는 걸 알자 겁이 났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공부를 시작해보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공부습관에 대한 확신없던 저는 당장의 시험이 대입에 반영되는 고등학교를 앞둔 상태로 매일이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숙사 입사를 일주일 두고 우물쭈물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역시나 놀라셨는데, 제가 듣고 싶은 공부법 강의와 코칭 프로그램을 등록하는데 약 100만원의 비용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고, 나름 정리하여 설명을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지원해주겠다고 하셨고 저는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머니가 입시로 가장 예민한 시기에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신다는 감사 뿐 아니라 당장의 성적을 보지 않고 그저 저를 믿어주신 것에 대해 놀랐습니다. 꼭 이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는 다짐을 반복했고 실제로 어머니가 저를 강하게 믿어주신다는 사실은 고등학교 입학식과 동시에 공부에 대한 열정과 의욕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한 과목의 공부법을 완전히 체화하여 졸업 때까지 그 과목만은 1등급을 놓치지 않겠다는 목표도 가졌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공부법은 수능 위주였으나 내신에도 적용되었는데, 수능이 가장 어려운 시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부법은 과목별로 굉장히 달랐습니다. 국어의 경우 비문학이 가장 어려웠는데 수능 및 모의고사 출제 지문들을 분석해야 했습니다. 하나의 지문에 있는 모든 단락에 제목을 달아서 지문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는 ‘나무와 숲을 파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공부법을 통해 글을 구조를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글을 읽는, 비문학 해석에서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 능력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영어의 경우 2년 간 문장만 해석했습니다. 영어도 수능 및 모의고사 지문들을 분석했는데 모르는 단어들을 따로 정리해두면 그것만으로 하루 외울 단어양이 늘 채워져서 3년 간 단어장을 몇 권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수학은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발전이 컸던 과목이었는데 중학교 때 소홀했던 함수를 시작하다시피해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수학은 고대의 약속임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 후 문제에 제시된 조건을 약속에 맞춰서 변형하여 풀어내는 과정이 패턴이었는데, 체화된 후 가장 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굉장히 많은 개념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개념들의 약속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 만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힘들었던 때마다 스트레스가 가장 컸지만 수학은 제 성적의 향상에 있어 제일 큰 변화를 주었기에 자존감 향상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과목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받은 상들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세 가지 부문의 상이 있습니다. 1등급을 받은 영어과목에 대한 상, 영어어휘경시대회 대상, 복지 부문에서 선발되어 받은 전남인재육성재단의 장학금입니다. 저는 공부법 코칭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영어 공부법을 정확히 체화하여 단어 암기, 문법 분석 및 문장 끊기의 패턴을 2년 간 쉬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그 결과 1,2학년을 통틀어 단 한번도 1등급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2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는 100점을 받아 1등으로 2학년을 마무리하며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영어어휘경시대회는 모의고사 및 수능 단어들을 위주로 모든 학년이 함께 치룬 시험이었습니다. 암기 시간이 부족했으나 평소 수능 공부를 하면서 단어 암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받은 대상이었고, 꾸준하게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깊이 느끼게 해준 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남인재육성재단에서 받은 장학금은 공부법 코칭 프로그램으로 도와주시고 믿어주신 어머니께 되돌려 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고등학생으로서의 시작을 코칭을 통해 안정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고 저를 믿어주신 어머니의 손을 장학금이라는 결과물로 채워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뿌듯했던 기억은 잊지 못합니다. 어설프게 학원을 다니며 문제 자체를 푸는 데 시간을 쏟지 않고 제게 정말 필요한 ‘선택’을 한 것을 전남인재육성재단에서 받은 장학금이라는 결과물로 ‘책임’질 수 있었다는 점도 제게는 매우 의미있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3학년 입시에서도, 영어의 다양한 언어학을 공부하여 영한 번역가가 되고싶다는 목표로 인하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하여 합격했습니다. 제 언어 감각의 발달이 공부법 코칭 프로그램에서 배운 언어과목 공부법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에 때에 맞는 경제적 지원인 장학금으로 어머니를 돕고, 지속적으로 공부법 코칭 프로그램을 통해 공부할 수 있던 그 시기는 제 한번 뿐인 학창시절을 후회없이 보낼 기회로 기억하게 해주었습니다.
“대학생 때 할 수 있는 것들은 다해보자!”
이 말은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가져온 하나의 모토였습니다. 농업에 종사하시는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 학과공부도 열심히 하여 성적장학금을 받으며 생활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대외활동들을 하며 제 자신을 꾸준히 한 단계씩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알게 된 전남인재육성재단의 장학금은 저에게 있어 마치 미래를 위한 씨앗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학교에서 진행하는 미국단기어학연수를 지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장학생에 선발과 함께 어학연수에도 합격을 하여 저의 목표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을 넘어 미국으로 !
미국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저의 과거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재학 시 중국교환학생을 다녀왔었습니다. 가기 전에는 부모님 품을 벗어나 낯선 타국에서 4개월 동안 잘 지낼 수 있을지 무섭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곳의 사람들은 제가 도움을 부탁하면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줄 만큼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또, 중국의 색다른 문화를 몸소 체험하면서 저는 점차 중국이라는 나라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4개월 동안, 하얼빈, 베이징, 내몽고, 상하이, 백두산 등 중국의 다양한 곳들을 돌아다니며 많은 중국인들을 만났고 이를 통해 저의 견문을 넓히고 제 자신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추억을 앉고 한국에 돌아오자 저는 미국이라는 더 큰 세상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세계강대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해졌고, 이러한 이유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단기어학연수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장학금을 보다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뻤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제 맘처럼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생각보다 비용도 굉장히 많이 들었고, 비자를 받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복잡했습니다. 비자면접을 받기 위해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고 막연한 영어공포증이 있는 저는 두려움에 떨며 비자면접을 보았습니다. 또, 학교에서 준비해주는 해외연수 대비 외국어 특강을 들으며 미국을 가기 전 저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뉴스에서 보던 미국의 총기사고, 테러사고 등 때문에 저를 포함한 가족들, 친구들 까지 걱정을 했었습니다. 하지만‘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미국행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미국에 가는 날,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인천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자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영어 실력은 늘어 올 수 있을까?’와 같은 걱정과 두려움과 동시에 설레임을 느꼈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약 11시간의 긴 비행동안 이러한 두려움과 설레임은 더욱 더 증폭되었고 미국에서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달이라는 시간을 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좌충우돌 미국 생활
미국생활은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베이글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조금씩 연습해 친구들과 함께 마트에 장도 보러가고, 여행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학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LA 그리피스 천문대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중국인 친구와 중국어로 짧게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중국인 친구를 만나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즐거웠습니다. 또,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마다 학교 체육관에서 배드민턴 클럽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 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두 명의 외국인 친구들과 친해졌고 그 중 한명과는 아직도 SNS를 통해 연락하고 지냅니다. 친구를 만나고 소통하는 것에는 국적이나 언어는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진심’이라는 것 역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미국어학연수를 통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가르침과 배움을 얻을 수 있었고 원래 목표였던 스스로의 시야 역시 넓히고 올 수 있었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LA, 라스베가스, 샌프란시스코, 디즈니랜드, 그랜드캐년 등 미국 서부에 있는 유명한 곳들로 여행도 가고 학교수업도 착실히 들으며 알차게 생활하였습니다. 물가가 너무 비싸 매일 점심을 사먹을 수 가 없어 아침 일찍 일어나 직접 샌드위치를 싸고, 저녁에는 그날 수업 복습 및 숙제를 하며 순간 이곳이 미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한 달 동안의 기억들은 저에게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꿈 너머의 꿈
어느새 졸업과 취업만을 남겨둔 대학교 4학년이 된 지금은 필요한 자격증 공부, 현장실습 등 소위 스펙 쌓기에 치여 여느 취준생과 비슷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은 미래 관광산업의 탐나는 인재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자 제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키우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꿈은 바로 국내 농촌관광을 활성화 하여 농촌에 활력을 더하는 것입니다. 젊은 관광객들을 농촌으로 올 수 있게 하는 행사와 같은 프로그램, 서비스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한 저의 목표는 한국관광공사에 들어가 국내 농촌관광 활성화뿐만 아니라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한 활동에도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미래의 목표를 위해 지역에서 주최하는 축제 체험프로그램 공모전이나, 관광 아이디어 공모전에도 도전을 하며 크고 작은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도전들이 모여 훗날 미래의 저의 꿈을 보다 단단히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이 세계 제1의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한 과정들에 직접 참여하며 기여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미래 관광산업의 탐나는 인재로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도 도전하고 성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꿈의 과정에는 전남인재장학금이 있었고 이번 공모전 역시 제 미래를 위한 발판 삼아 더 멀리 더 높이 도약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덧붙여, 코로나 사태가 끝난다면 유럽, 베트남, 싱가포르 등 보다 다양한 나라에 여행을 하면서 저의 시야와 견문을 더욱 더 넓히고 싶습니다. 여행하며 제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먼 미래에는 그 글들을 토대로 제 이름으로 된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큰 꿈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라는 말처럼 저는 앞으로의 미래를 보다 욕심 있고 야망 차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도전하고 부딪히는 자가 이룰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 믿고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도전하며 후회 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회복지사’는 서연이의 꿈.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셨잖아요!”라고 대답하는 너의 말에 순간 멍했지만 이내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의사도, 판사도 아닌 남을 도와주는 일이 가장 어렵고 큰 꿈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이 너무나도 예뻤던 것이다. 어느덧 4년 넘게 교육 봉사로 아이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의 집에 방문하여 교육, 운동뿐만 아니라 진로를 함께 고민하면서 아이가 올바른 가치관으로 성장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와 멘토링을 진행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교재를 제외하고 해당 센터에서 금전적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멘토링의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지만 가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미안함이 멘토링 활동의 가장 큰 힘듦이었다. 그러던 중 전남인재육성재단 장학생 공고를 보게 되었고, 장학금으로 아이와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지원했다. 그렇게 나는 장학금을 받았고, 아이와 더 많은 곳을 누비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날씨가 좋으면 산책을 가곤 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책 속에 갇힌 삶을 살게 해주고 싶지 않았고 너 또한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길을 거닐 때면 너는 끊임없는 질문을 하곤 했다. “선생님 저 새 이름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저 새는 직박구리라는 새야~.”라는 대답에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선생님은 새박사예요?”라고 물어보는 너. 나도 잘 몰라서 미리 공부해온 나를 네가 알 리가 있을까.
‘호기심왕’이라는 말은 너를 소개하기 위해 존재하는 단어인가보다. 너와 함께 있는 동안 넌 나에게 “선생님! 이건 왜 그러는 거예요?”라며 질문을 많이 한다. 가끔은, 아니 자주 너는 나에게 당혹스러운 질문도 한다. 하루는 책에서 읽었다며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맞아볼래?’라는 말뜻이 뭐냐고 물어보는 너에게 뭐라고 말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게 비폭력적이면서도 하나의 관용어임을 나는 어떻게 설명할까. 또 개미는 나무를 오르는데 왜 안 떨어지고 잘 올라가는지 궁금해 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하나하나가 놀라웠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체가 너무 기특하고 감사했다. 우주비행사가 왜 우리나라에 한 명밖에 없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네가, 나는 그런 대단한 일을 네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너를 가르치지만, 되레 내가 많은 걸 배우고 있다.
가끔 아이는 자신의 환경에 대해 속상해한다. 하루는 “선생님! 사회 시간에 핸드폰 어플로 수업하는데 나만 핸드폰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혼자 가만히 있어요. 바보가 돼요.”라고. 또 “선생님! 저는 공부가 너무 싫어요. 친구는 분수도 할 줄 아는데 저는 뒤처지고 있어요.”라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너에게 나는 “괜찮아~ 선생님도 중학생이 돼서야 핸드폰 있었어. 그리고 좀 뒤처지면 어때~ 누구나 처음에는 잘 못해!”라고 말해준다. 그럼 이내 아이는 나 같은 훌륭한 사람도 그랬냐면서 이내 안심이 되듯 편안한 웃음을 보인다. 나는 널 통해 내가 아닌 상대방 눈높이에 맞춰 공감하고 반응하는 것을 배웠다. 네가 있는 상황이 누구보다 빛나는 삶이며, 너는 누구보다 사랑 받는 존재임을 뭐라고 해야 네가 알까. 꽃같이, 아니 꽃보다 더 사랑스러운 너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힘이 되는 말을 할지 오늘도 나는 고민한다.
너는 나에게 열심히 산다며, 자꾸 모범생이라고 한다. 11살 아이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기분이 좋다. “선생님! 이거 교육 멘토링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거예요, 아님 억지로 해야 해서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봤다. 놀랐다. 수없이 독특한 질문들을 많이 받아왔지만 이런 너의 당돌한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학교에서, 이 사회에서 봉사를 시키지도 않았고 억지로 한 적도 없다. 그저 조금 아니 많이 부족한 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게 너라서 더욱 행복하다. 너는 나에게 마음이 예쁘다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본받고 싶다고 했다. 너의 그 꽃 같은 작은 눈에 내가 그렇게 비쳐졌다면, 나의 24년 삶은 누구보다 값지게 살아온 것이다.
아이는 동물을 참 좋아한다. 강아지, 고양이는 물론 개구리, 개미까지 모든 동물을 사랑한다. 어느 날 나는 아이에게 사육사가 되어보는 것을 제안했다. 이내 “그건 불쌍한 애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잖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소녀에서 이렇게나 예쁜 마음씨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너에게 ‘좋은 일을 하고도 돈을 벌 수 있구나. 아니, 좋은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너의 그 예쁜 마음이 꽃이다.
첫 만남이 생각난다.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게 부끄러웠던 나는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달라 했다. 하지만 너는 당돌하게 “어떻게 선생님을 언니라고 불러요! 선생님은 선생님이지.”라고 되레 나에게 말해주었다. 항상 수동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왔던 내가 누굴 가르친다는 것은 뿌듯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늘 수업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무슨 활동을 해야 얘가 지루해하지 않을까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네가 나를 언니처럼, 선생님처럼 잘 따라줘서 나는 한없이 고맙다. 너도 언젠간 교복을 입고, 입시를 치르고, 대학을 가겠지. 그 순간들의 행복한 모든 찰나에 내가 같이 있어줄거란 확답을 못해 슬플 뿐이다. 너는 꽃이기에 네가 가는 길 모두 활짝 피어나길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너를 응원한다. 너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작지만 큰 배려와 사랑이 우리라는 꽃을 피우게 한다. 얼굴도 마음도 예쁜 친구야, 시간이 지나더라도, 나처럼 어른이 되어도 희미하게라도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끝으로 이런 소중한 추억과 경험 쌓게 도와준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께 감사합니다. 금전적인 지원덕분에 멘토링의 양과 질이 더욱 풍부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더욱 세상에 빛을 뿌리는 장학생이 되겠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서류를 주면서 이거 한번 읽어보고 해당하면 신청하라고 했습니다. 읽어보니 전남인재육성재단에서 운영하는 장학금 관련 공고였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읽어보니 다양한 장학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신청할 수 있는 영역을 하나씩 찾아보고 비교해 보았습니다. 고등학생, 장흥 지역, 다자녀 영역에서 신청할 수 있었고 그 중 다자녀 장학금을 신청했습니다. 마감날에 제출서류를 마무리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습니다. 먼저 받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를 일을 마무리해서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몇 번 받은 적이 있지만 받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받게 된다면 또 어떤 경험을 할까 기대가 되었습니다.
2020년 6월 24일에 카드 잔액을 확인해봤는데 평소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은행 앱으로 잔액 조회를 했는데 장학금이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기분이 좋았고 그다음에는 장학금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장학금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고 평소에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은행에 가서 돈을 일부 찾아서 봉투에 담아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받자마자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이번 장학금 받아서 용돈 드리는 것이라고 하자 활짝 웃으셨습니다. 아버지께 드렸을 때는 고맙다고 들어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신이 났습니다. 장학금으로 이렇게 두 번째 부모님께 드리는데 드릴 때마다 제일 후회가 없었고 인상이 깊었습니다. 다음번에도 또 드릴 기회가 금방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은 장학금을 어떻게 써야 후회 없고 잘 썼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생각하던 중 지금 필요한 문제집과 책을 샀습니다. 이번에 고등학교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수험생이 되면서 풀어야 할 문제집이 평년보다 더 많이 늘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능 특강 시리즈만 수능 특강 독서, 문학, 화법과 작문, 수학 Ⅰ,수학Ⅱ, 확률과 통계, 미적분, 화학Ⅰ, 물리학Ⅰ 등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수능 완성, Final 실전 모의고사 등을 사야 했습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 사는 게 저에게 도움이 되지만 부모님께 부담되는 것 같아서 살 때마다 마음 한 부분이 불편했습니다. 다행히도 장학금이 받아서 이런 부담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지금도 수능 특강이나 수능 완성 등을 복습할 때 장학금으로 산 거라 뿌듯하고 자신감,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지원을 받지 않고 사서 저에게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집도 사는 겸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샀습니다. 중학교 때 교육청에서 하는 독서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독서라는 것이 참 좋은 활동 또는 취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책은 가장 조용하고 변함없는 벗이다. 책은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가장 현명한 상담자이자, 가장 인내심 있는 교사이다.”라는 말을 찰스 w. 엘리엇이라는 한 말을 명심하고 혼자 집에 있을 때는 핸드폰보다는 자주 독서를 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때론 힘들지만 한 권을 다 읽고 또 읽을 때 그 성취감과 만족감은 엄청나고 행복합니다. 이번에 유발 하라리가 쓴 『호모 데우스』를 6개월 동안 읽었습니다. 500페이지라는 많은 양과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꾸준히 읽어 다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생명 과학Ⅱ에 배운 생명 공학 내용(신경 세포, 유전자 조작 등)을 연결해서 읽으니 더 깊게 이해하고 수업 이해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 읽으니 생명 공학 발달로 인한 사회 문화 변동에 대해 고민하면서 사회 문화 선생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거나 공부와 조사를 하고 나니 이게 진짜 공부하는 것이다고 느꼈고 대학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삶이 기대되었습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 『더 위험한 과학책』, 『공간이 만든 공간』 등을 읽었고 저의 학업 능력을 기르고 미래에 어떤 꿈을 가질지 상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위에 고마운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저와 고등학교를 같이 지내면서 밥도 먹고 수학여행도 같이 가고 야간 자율 학습을 보낸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간식을 사서 나눠 가지거나 좋은 일을 같이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런 친구들을 내년에 못 본다니 아쉬워졌고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봐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서 반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렇게 장학금 일부로 또 좋고 행복한 기억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같은 지역에 살지는 않지만, 전남 내에서 사는 친구와 뜻깊은 일을 같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환 일기를 쓰기로 한 것입니다. 최근에 카카오톡이나 전화로 기다림 없이 연락하거나 SNS 자주 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뭔가 색다른 것을 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생각하던 중 직접 일기를 손으로 쓰면 생각을 정리하거나 스트레스 해소할 수 있어서 일기 쓰는 게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제안해 일기장을 사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교환 날짜까지 기다리면서 처음에는 조바심이 났지만,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기를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오랜만에 쓰니 너무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써 내려가는 것이 뿌듯했고 감사할 수 이유를 하나씩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한번 외식하는 것, 친구들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대입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어하며 보냈던 것 하나하나가 좋은 추억이며 지금 웃을 수 있고 회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밤에도 공모전 준비한 것을 소재로 일기를 쓸 텐데 어떤 글이 나올까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는 토론하기, 참여형 수업, 영화 감상 등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이런 활동을 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런 활동 등을 대신해 PPT 만들기, 리포트 작성하기, 공모전 관련 글쓰기 등을 많이 해야 했고 했습니다. 하면서 힘들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시간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 내 생각 정리를 통해 내가 누구이며 어떤 거를 좋아하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고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수기 공모전을 봤을 때도 참여하면 좋겠지만, 시험이 끝나고 며칠밖에 시간이 없어서 참가하는 것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참가 관련 메시지를 받고 한 번 더 고생해보자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다 쓸까 고민을 했지만 이렇게 쓰면서 저는 또 즐거웠고 이 공모전에 참가하기를 잘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2020년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대입에도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점이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장학금을 통해 진짜 좋은 시간을 보냈고 추억을 글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이번 장학금이 저에게 한편에 소중한 선물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