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들어와 제대로 내 꿈을 펼쳐보자 했던 20살의 나, 내가 원하던
대학교와 전공에 합격했을 당시 내 꿈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생각지도 않는 형제들을 보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그래서 더더욱 대학교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꿈을 이뤄 가족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랑스러운 내가 되고, 형제들이 가정형편 때문에 숨겨왔던 꿈을 되찾을 수 있도록 희망을 심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기쁨도 잠시, 대학교에 들어와 매년 기숙사비를 내면서 학교를 다녀야 하고, 교재비도 만만치 않음을 느끼며 이때부터 나의 방학과 학기 중은 온통 생활비와 학업 유지비를 벌기 위한 고군분투에 가까웠다. 방학 중에는 주변 친구들이 같이 토익학원을 다니자고 권유했을 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화가 났고, 학기 중에는 바쁜 학업 스케줄에도 근로를 함으로써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도 학업과 일을 병행한 탓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꿈을 응원해주던 가족들을 떠올리며 번아웃 상태로 학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3년 가까이 보내던 중 아는 선배로부터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서 전라남도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해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내 삶에 나비가 날아왔고, 작은 변화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먼저, 나에게 시간이 생겼다. 여태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쏟아부었다면 장학금을 통해 생활비 부담이 줄어들게 되면서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여 자격증 공부를 했고, 그 덕에 내 꿈이었던 공무원이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렇게 달콤한 방학이 있었던가. 생활비도 벌고, 자격증도 따고 내가 정말 바라왔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적인 부담이 줄어들게 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면서 과거의 밝았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다음, 나비의 날갯짓은 4학년을 진입하고도 계속되었다. 이제 정말 내
꿈이 무엇인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때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꿈은 ‘산림청 공무원‘ 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동적인 공무원보다는 능동적인 공무원이 되어 정말 우리나라의 산림에 도움을 주는 인재가 되는것이었다. 그래서 공무원 준비를 하기 위한 인터넷 강의와 교재를 알아볼 시기에 나비가 날아왔다. 갑작스러웠지만 내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새로운 도전 및 모험을 할 수 있는 아주 의미 있는 기회였다. 그것은 바로 `대외활동'이었다. 평소 같으면 시간이 없어서 거절을 했을테지만, 장학금을 통해 시간을 벌었고 나에게 대외활동을 권유한 친구가 나와 같이 학과에 관심이 있고, 전공을 살려 미래 직업을 가지고 싶은 친구였기에 순순히 친구의 권유를 승낙했다. 그렇게 나는 한마음으로 모인 학과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났고 우리의 모험은 `나의 꿈을 찾기'였다. 물론, 나에겐 공무원이라는 꿈이 있었지만 우리 학과 선배들이 대부분 공무원을 준비했고, 학과 교수님도 내게 전공 성적이 좋은 이유만으로 임업직 공무원 시험을 쉽게 볼 수 있을 거라며 공무원을 추천해 주면서 공무원이라는 꿈을 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공무원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몰랐고 전공 연계 직업이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몰랐을뿐더러 내가 정말 공무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드는 것이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 모험을 통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내가 이 모험을 통해 얻은 것은 첫 번째로, 하고 싶은 꿈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나는 학과 친구들과 함께 꾸려낸 팀으로 학과의 근본적인 직업인 공무원을 시작으로 연구원, 수목 관리원 등 전공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을 탐색하면서 진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재능기부 차원 테라리움을 활용하여 대학교 인근 아동센터에서 교육을 실시하고, 강원도 오대산을 등산하면서 친구들에게 식물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이때만 해도 교육이라는 의미는 내가 잘하는 분야였지, 하고 싶었던 분야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러다가 탐방기관에서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해 해설을 듣고 산림박람회에 참여해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그 사실은 '숲해설가'라는 산림교육 관련 직업이 청년층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큰 충격과 희망을 함께 가져다주면서 내 삶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충격을 입었던 이유는 숲해설가와 관련해서 내가 알던 사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과거 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주변으로부터 숲해설가는 정규직보다 기간제가 더 많고 장년층이 많이 한다는 소식에 그 당시 이제 막 대학생이 됐고, 그 꿈이 전부였던 나는 모든 것이 허망이 된 기분이 들어 이 불편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빠르게 포기했었다. 그래서 새로운 꿈인 공무원을 꾸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스스로 부정하면서 잊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번에 나비의 작은 날갯짓을 통해서 시간을 얻고 시작한 이 모험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되찾아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두 번째는, 따뜻한 정이다.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했던
나에게는 학과 친구들과 만날 시간이 부족했던 탓인지 특별한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또한,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학과에 관심이 크지 않아서 서로 같이 비전을 나누기도 어려웠고, 산림자원 전공생이라면 당연히 했을 등산조차도 실습 외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모험을 통해서 학과 친구들과 비전에 대해 나누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이 덕분에 꿈의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1,563m에 달하는 오대산 정상을 올랐는데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따뜻한 온기로 남아있다. 그때의 상황은 다 같이 정상까지 오르는데 한 명씩 돌아가면서 체력부진으로 힘들어할 때 누구 하나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 그 한 사람을 위해 모두가 쉼을 가지면서 `포기하지 말자, 우린 해낼 수 있어'와 같이 서로를 격려하고 힘이 돼주었다. 그리고 끝내 우리 모두 정상에 올라섰다. 이를 토대로 친구들로부터 따뜻한 정을 배울 수 있었고, 연대감을 느끼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경험한 나비효과는 대학교에 들어와 생활비와 학업비를
벌기 위해 쉴 틈 없이 살아온 나에게 `장학금'이라는 나비가 날아왔고, 이를 기점으로 학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아르바이트 대신 자기 계발 시간을 늘려 자격증을 따고, 후에는 시간적 여유로 대외활동을 시작하면서 서로 의 꿈을 응원해 주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진로 탐방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면서 나비의 날갯짓은 종점을 찍었다. 따라서 내가 꿈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내게 시간을 선물해 준 나비, 즉 `장학금' 덕분이다.
앞으로는 내 삶에 나비가 날아와 내 꿈을 찾아준 것처럼 나도 멋진 `숲해설가'가 되어 누군가에게 꿈을 찾아주거나 심어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무엇보다 세상에 숲의 소중함을 알려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숲의 보전에 힘써 후세대에도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주고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 또 하나의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나비'가 되기로 다짐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여운입니다. 이 단어는 겉으로 보기에도 동글동글 귀엽고, 입 밖으로 내뱉을 때에도 편안한 어감을 가지고 있고, 발음하고 나면 입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게 해줍니다. 하지만 제가 이 단어를 제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 계기를 설명하려면 먼저 제가 무대미술을 시작하게 된 이유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2018년, 중학교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러 가는 문화체험 학습을 신청받았고 당시 뮤지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저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신청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학교를 빠지고 가는 체험학습이었기에 수업을 빼려고 어쩔 수 없이 온 친구들도 허다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별 기대 없이 뮤지컬을 관람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이 끝날 때쯤에는 온몸에 전율과 함께 눈에 눈물까지 맺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에너지와 음악이 쏟아내는 감정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을 극대화해주는 무대장치들까지. 저는 그 작품을 본 뒤 여운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음악과 미술, 무용이 조화를 이루는 예술의 집합체에 완전히 매혹되어 그 당시 미술을 하고 있었던 저는 자연스럽게 무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해 중학교 축제 무대를 온전히 책임지고 팀원을 꾸려 제작하고 인터넷으로 뮤지컬 영상을 찾아보는 등, 무대미술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여운’. 저는 뮤지컬을 보고 난 뒤 제가 느꼈던 제일 큰 감정이었던 여운을 제 마음속에 깊게 새기고, 누군가에게 여운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술고에 입학하고, 한반도 끝 남해 바다 앞에 살고 있던 저에게 무대 미술과 진학 준비를 하기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뮤지컬 한 편을 보기 위해 서울을 왕복하고 20만 원에 육박하는 티켓값을 내기에는 큰 부담이 되었고, 무대미술 실기학원은 서울에 몰려있어 서울을 왕복하며 비싼 입시미술 학원을 다니기에는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코로나에 걸리셨던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후유증으로 인해 급격히 나빠지면서 집안의 수입이 절반이나 넘게 줄어들어 형편은 더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중학생 때 했던 저의 다짐과 무대미술에 대한 갈증을 애써 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 장학금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동아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황금 동아줄을 잡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키워왔던 무대미술에 대한 제 열정과 진심을 담아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였고, 그런 제 진심이 닿았는지 2020년 으뜸인재 발굴대회에 예체능 인재로 선정되었습니다. 저는 이 장학금으로 서울로 올라가 무대미술 입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생회 행사 기획부에 부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의 다양한 행사들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며 무대미술 관련과 진학을 위한 생기부를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은 3년 동안 위키드, 아이다, 팬레터, 시카고 등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들을 관람할 할 수 있었고, 이 경험들을 소중히 여겨 뮤지컬 한 작품을 볼 때마다 감상문과 후기를 작성하여 개인 블로그에 차곡차곡 저장해왔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열심히 무대미술 입시를 준비한 결과, 무대미술 분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중앙대학교 공간연출과에 당당히 현역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시골에서 무대미술을 배우며 느낀 제일 큰 어려운 점은 공연예술
을 누릴 수 있는 인프라가 서울, 경기권으로 매우 좁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공연예술을 취미로 가지기 힘들고, 소비자들이 한정되어 진입장벽은 높아져만 가는 것이 공연예술의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서 큰 도움을 받은 만큼 전라도에도 대학로 같은 공연예술의 거리를 만들고 활성화시켜 한반도 끝 지방에서도 공평하게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인프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여운의 사전적 의미에는 제가 뮤지컬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의미하는 뜻 말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떠난 사람이 남겨 놓은 좋은 영향’.
저는 훗날 누군가에게 여운을 남기는 무대를 만드는 훌륭한 무대미술가가 되어 저와 같은 길을 걷게 될 후배들에게 여운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게 저의 최종 목표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 마음에 새겼던 여운, 당돌했던 저의 다짐, 그리고 현실에 부딪혀 애써 지우려 했던 무대미술에 대한 열정을 다시 꺼낼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의 꿈은 음악 교사다. 단순히 임용고시를 거쳐 교재 속의 음악만을 전하는 선생님이 아니다. 실전의 많은 경험을 통해 직접 느끼고 배운 것들을 생동감 있게 전하며 학생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다.
2003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화예술회관 대극장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주역인 ‘칼라프’ 왕자를 맡았던 아버지의 오페라 공연을 보며 무슨 느낌을 받았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수 백명의 관객들 속에서 관람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으리으리하고 웅장한 공연장, 화려한 조명과 색색의 의상을 걸친 무대 위의 많은 무용수에게 정신을 뺏기다가 어느새 깊은 잠들었을 법한 나이인데. 네 살짜리 꼬마가 그 긴 시간 동안 깨어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마치 예전부터 알던 노래인 것처럼 오페라 곡의 선율을 흥얼거리던 나의 모습을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고 한다. 부모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으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노래 대회에서 수상을 했고, 부모님이 지도하시던 합창단 속에서 노래하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없는 곳이 있을까?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뱃속에서 태교음악을 듣고 어린 아이의 장난감에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폰에도, TV 속 드라마와 영화, 많은 프로그램과 뉴스까지.. 음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철부지였던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노래가 좋았고 친구들과 싸워도, 부
모님께 꾸중을 들어도, 언제나 음악은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중학교 시절 음악코치를 하셨던 엄마를 따라 잠깐 참여했던 뮤지컬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된 교수님을 통해 노래와 연기를 배우며 뮤지컬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다른 진로를 권유하셨다.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뒷바라지해 줄 형편이 되지 못하는 현실과 설령 음악을 전공하더라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 반대하시는 이유였다.
부모님은 없는 가정 형편에 레슨을 제대로 받지 못한 환경에서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음악을 전공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러한 어려움을 잘 아셨고 세 자녀를 둔 우리 집 상황으로는 꾸준히 뒷받침해주기 힘들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따로 레슨도 받지 않고 동요대회에 나가면서 터득했던 모든 것들을 기억해내며 혼자서 실기시험을 준비했고 드디어 예술고에 합격했다. 결국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내가 일반고보다는 예술고에 진학하는 것이 더 행복한 고교 시절을 보낼 것이라며 부모님도 허락하셨다.
예술고에 입학한 후 나의 꿈은 명확해졌다. 친구들을 너무 좋아해서 내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공부에 관심 없던 친구들의 질문에 친절히 설명해 주었고 어느 순간 그 친구들의 성적이 오르는 것에 뿌듯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왕성한 음악 활동을 병행하면서 장애우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음악을 가르치고자 애쓰시는 아버지처럼 음악 선생님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미리 전공을 준비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나의 실력은 부족했고 교내 전공 수업만으로는 실력을 키워나가기 어려웠다. 교외에서 따로 사교육을 받아야 했고 콩쿨을 참가하거나 교내 시험을 볼 때면 사례비를 주며 반주자를 고용해야 했다. 다행히 피아노를 전공하신 어머니의 반주로 시험과 콩쿨, 그리고 대학 입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 실력으로는 넘기 힘든 음악교육과의 문턱이었지만 재도전을 해 합격할 수 있었고 나의 꿈에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큰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입학한 후부터는 생활비와 전공 레슨, 반주비 외에도 임용고시 준비를 위한 교육과정의 범위가 더 넓어진 것이다. 대학 학비와 생활비 전부를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해결하면서 힘든 시절을 보내셨던 아버지는 일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우니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었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반대하셨는지 그제서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으뜸인재 발굴대회 포스터를 접하게 되었고 큰 기대를 하며 접수를 했지만 서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 이후 더 많은 연습시간과 노력을 하면서 여러 콩쿨에서 우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고 재도전 끝에 감사하게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021년 8월, 군 입대를 앞둔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선물이었다. 첫 학기 장학금으로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부족했던 반주법과 시창, 청음 지도로 뛰어난 선생님을 찾아 부담없이 지도를 받으며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더욱 좋아진 음감 덕분인지 단 한 명만 모집했던 해군 군악병에 합격하게 되었고, 내년 4월 제대를 앞둔 지금도 주어진 전공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열심을 다해 연구하며 의미 있는 군 생활을 보내고 있다.
나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깝게 해준 새천년 으뜸인재 장학금이 있어 남은 재학 기간동안 교육비 걱정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기회를 주신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과 후원자님들께 정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과 고비가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지지자들을 생각하며 잘 헤쳐나갈 것이다. 다양한 음악 활동과 경험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들을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어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려고 한다. 언젠가 나와 같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도록.
저는 한국 아버지와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도 멀게만 느껴질 나라인 필리핀에서 오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로 어머니께서는 연락을 끊고 제가 먹새질이 끝나기도 전에 저를 아버지의 곁에 두고 본인의 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딱하게 여기신 친척들은 저를 해남에 있는 등대원에 맡기셨고 지금까지 너는 그 시설에서 생활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가족의 정이라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왔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갖고 있었던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대해 배우고 인정하며 제 스스로를 아주 천천히, 서툴게나마 용서하고, 아낄 수 있는 제가 되었고, 가족의 정을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살아온 다른 이들보다 건강하고 밝은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가끔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릴 무렵 아버지의 땀냄새와 어머니 사랑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강바람에 흔들리는 달처럼 저 또한 그러하면 안될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다잡고 생활하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제 주변의 친구들을 돌아보니 저만큼이나 어려운 친구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밤(열매)의 보늬처럼 여리고 약한 사람들을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큰 울림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습니다.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기억과 망각의 주기가 되풀이되었고 밟아도 뿌리 뻗는 잔듸풀처럼 삶에 찌들지 않고 저의 머릿속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부사관이라는 꿈이 명확하고 구체화 되어갔습니다.
그렇게 저는 전남 장성에 위치한 부사관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제가 스스로 저의 인생을 설계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딘 결과가 점차 결실을 맺고 있는 듯 싶었지만 행복과 불행은 늘 십자지 한 장의 차이처럼 다가오듯 경제적인 문제는 저에게 꿈은 거짓의 기대와 헛된 욕망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들게하였습니다. 그 때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 한울타리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한 번 더 전력질주 할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현재 원활한 학교생활 뿐만 아니라 학생회장 직책까지 맡고 과거를 회상하며 이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인정받으면 기대에 부응하려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저라는 것을, 누구보다 사랑에 갈급하여 사소한 호의에도 감동하며 감사를 아는 학생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소망하며 제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싶은 생각은 모든 학생들이 갖는 간절한 염원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만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해도 모두가 똑같은 여건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훌륭한 멘토로부터 학습요령이나 학습비법을 터득해 효율적으로 공부한다면 능률도 높아질 것입니다.
지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취득한 선배 학생의 학습비결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지금껏 가정환경을 고려해 학교 공부와 복습, 예습 등으로만 학습해서는 체계적으로 심화되는 각 과목들을 효율적으로 터득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 등교할 수 없는 기간 동안 학교 수업을 온라인으로 대체해 공부할 때는 능률이 더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2021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취득한 선배 학생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알게되었습니다만 학교 공부와 연계해 추가적으로 온라인 수강 등 학습을 보조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온라인 수강이라하더라도 적은 비용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동생들도 많은 다자녀 가정환경을 고려할 때 부모님께 요청하기가 쉽지 않아 망설여졌습니다.
분명 중학교와는 다른 방식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고 무엇보다도 점점 심화되고 궁금증이 증폭되는 각 과목들을 효율적으로 학습하기 위해서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버겁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싶지 않아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히 원하고 바라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이 이뤄진 것은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장학사업 중에 희망나래 장학금 한울타리 장학생을 신청해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장학금을 받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돈을 조금 더 보태 온라인 수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최선을 다해 공부한 성과로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이 나오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습 성취 면에서 기대수준에 이르지 못해 점점 절망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꿈을 꼭 성취하기 위해 기필코 공부해야한다는 굳은 마음과 함께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온라인 수강을 신청해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빛과 소금과도 같은 장학금이었습니다. 일부 부족한 돈은 부모님께 도움을 받긴했습니다만 유명 온라인 강좌를 신청해 매일매일 꾸준하게 공부했습니다. 학교 수업 중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선생님 수업에 지장을 줄까봐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하거나 연속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온라인 학습상담 자료를 올리면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줘 훨씬 학습효율이 높아졌습니다. 학교 성적이 향상되고 노력한만큼 성과가 나오면서 미래 꼭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신념에 찬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본인 노력으로 인한 성과라고해도 장학금을 받아 온라인 강좌를 수강한 결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 와 본 낯선 산속에서 날이 저물어 어두컴컴한 길을 헤매다가 불켜진 인가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시청해 학습능률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 함양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재학중인 매성고등학교에서 주관하는 1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학창의력대회에서 영예의 1등을 차지해 상장과 상품을 받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셨지만 저로서는 장학금을 유익하게 활용해 학습능률을 높이고 좋은 성과를 얻게 되어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앞으로 꿈과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토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하겠습니다.
어릴적부터 막연하게 이루고 싶었던 학업의 꿈을 낮에는 장사를 하고 저녁에는 해남에서 목포로 학교를 다니며 이루어 나가고 있던 중 만학도를 위한 좋은 장학제도가 있다는 것을 주변을 통해 알게 되어서 딸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신청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늦깍이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늘봄 만학도 장학생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저도 환갑을 바라보는 만학도이지만 저와 같이 저녁에 학교에 등교하는 만학도들은 저보다도 다들 연배가 높으신 고령 학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균 연령 70세 이상인 학우들이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나름 우리반의 젊은피로 총무일을 맡아서 하며 언니, 오라버니들과 즐겁게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녁 장사를 포기한 채 오후 4시 30분에 해남에서 출발해서 학교에 오후 5시 30분쯤 도착하여 차에서 간단하게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후다닥 요기하고 반으로 향하여 수업을 듣고나면 저녁 9시 20분쯤. 다시 해남으로 오는 고된 통학길이지만, 늘봄만학도 장학금을 받은 뒤로는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나와 같은 생각과 형편을 가진 학우들과 수업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할 수 있었던 늘봄 만학도 장학금을 우리반 학우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주변의 많은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2022년 늘봄만학도 장학금도 올해 초부터 딸에게 우리반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신청을 했음 한다고 사업이 시작하면 알려달라고 미리 못을 박아 두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학우들에게 괜한 기대심만 준건 아닌지 걱정도 앞섰습니다. 그러던 중 하반기에 신청을 시작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신청서류 12명 분량을 뽑아 신청서류에 늘봄만학도 부분에 표시하여 강조설명과 함께 다른 반과 우리반의 학우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우리반 학우는 총 6명 신청하였고, 다들 어려우신 형편에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학교에 다시시던 분들이였는데 6명 모두 늘봄만학도 장학생에 선정되었습니다. 선정 소식을 듣고 너무나 감사해하며 학업의 의욕이 넘치고 있습니다. 어려워서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저와 학우들 모두 값진 선물과 같은 장학생 선발로 중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학업을 계속 이어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진학하여 꼭 마음과 지식의 발전시켜 주변과 사회를 위하여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만학도분들에게 자신있게 말씀드리고 싶은건 시작이 반이라고, 시작하신다면 이미 반이나 성취하신거나 다름없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에 재학중인 저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배달 대행 아르바이트를 줄곧 해왔습니다. 학부 공부로도 바쁘고 벅찼지만, 아버지를 여의어 혼자가 되신 어머님께 대학생이 되어서는 부담을 줄여드리고 싶어 아르바이트를 계속했습니다. 바쁜 생활을 지내던 중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장학제도를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현재는 3년째 수혜받아 학업을 여유롭게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3학년이 되니, 제 주변에는 스타트업, 공학공모전 수상 등 멋진 꿈을 이룬 사람이 많았습니다. 부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과 위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까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들이 현실의 벽에 맞닿았을 때, 좌절하지 않게 해준 것은 그 꿈을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진흥원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꿈이 확실해진 만큼 현실적 조건에 무너지고 싶지 않았고, 진흥원은 저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지원자였습니다.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저의 삶은 ‘여유’입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시간적 여유 없이 생활한 기간이 길었습니다. 그런 와중, 장학금은 저에게 있어서 큰 여유가 되었습니다. 단순 이론적인 학과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발판이 된 것이죠. 이론 공부 이외에도 다른 활동을 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저는, 대학교 공학교육혁신센터에서 진행한 공학 공모전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팀원들과 논문/특허 분석, 반도체소자 합성, 프로그램 코딩, 프로토타입 제작 등 공학 연구 활동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이 다시 이론 공부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저희 팀은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도 할 수 있었고, 반도체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꿈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토록 확고한 꿈이 있을 때, 가장 공부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은 덕분에 저는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음악’이라는 취미가 있습니다. 공부를 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기타연주로 풀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 밴드동아리에서 좋은 기회로 공연부장을 하게 되면서 다양한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공연 음향 세팅, 장비 조작, 믹싱 등 듣고 조작하는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학금으로 여유가 생긴 저는 이러한 공연 세팅을 더욱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경험이 쌓이고 쌓여 저는 어느새 대학교 내에서 이름있는 음향 엔지니어가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학과 행사에서 저를 엔지니어로 섭외한 적도 있었습니다. 장학금으로 여유가 생겨 취미 생활을 했을 뿐인데 재능이 되어 있었고, 이 재능이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음악이라는 취미, 저의 활력소를 지켜준 진흥원에게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이 저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어 인생을 바꿔
준 것처럼,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다면 저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제 스스로를 ‘사연 많은 신입생’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이유는 현재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기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 또한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안군 청계면에 소재지를 두고 있는 ‘국립목포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하여 2학년 1학기까지 경영학에 대해서 자세히 배웠습니다. 대학교에서 배운 전공 지식은 저의 적성에 맞았고 흥미가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기업 인사팀 입사라는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라남도 영암 경찰서에서 의무경찰로 군복무를 하면서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었고, 이는 저의 진로가 ‘소방관’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은 어떠한 현장에서도 항상 앞장섰고, 사람의 생명을 제 1순위로 여기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가져,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전에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시험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은 저는 처음 결심했던 그 마음을 점점 잊어버리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며 아쉬운 시간들을 보냈고, 자연스레 두 번째 시험에서도 낙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학교 자퇴와 두 번의 시험을 낙방한 저에게 남은 것은 전역증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친구들, 전문대학을 졸업해서 유망한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 전기기사 자격증 준비 등 자기의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같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남긴 것이 없는 저 스스로를 비난했고, 늦은 방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한다는 생각이 저를 더욱 깊은 방황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방황에 빠져있을 때 다행히 주변 지인의 권유로 순천제일대학교 제철산업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제철산업과에 입학하여 능력이 있으신 교수님들께 제철산업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배우며 전반적인 이해를 넓힐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저의 취업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동기들에 비해 훨씬 늦은 나이로 새로운 전공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낮아질대로 낮아진 저의 자존감을 회복하는데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저희 대학교 공학관 입구에서 ‘전라
남도 인재육성 장학금’을 안내하는 홍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는 이번 장학금 수혜를 받는 것을 저의 자존감 회복의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성실히 자기소개서 및 지원서를 준비했고, 제출해야할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서 제출했습니다. 제출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이는 저의 꿈을 구체화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전라남도 인재육성 장학생에 선발이 되어 약 150만원이라는 너무나도 큰 장학금 수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장학금의 액수보다는 제가 ‘전라남도 하반기 인재육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이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 누구보다 느리고, 낮아보였던 제가 전라남도 인재육성 장학생에 선발될 정도로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큰 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장학금을 처음 수령했을 때에는 이 큰 금액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되돌아보았고, 꿈을 위해 소모되는 비용들에 투자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먼저는 자격증 취득을 위해 전기, 가스 기능사 등 전공 관련 자격증 서적 4권을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구매한 자격증 서적을 열심히 공부하여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전기기능사’자격증 취득을 위해 장학금을 사용하여 동부직업학교에 등록했습니다. 학원 등록 이후 실기시험 또한 필기시험과 같이 성실히 준비한 결과 전기기능사 자격증 시험 합격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생애 처음 부모님의 도움에서 온전히 벗어나 제 꿈을 위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했던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낮아져있던 저의 자존감이 100를 넘어 그 이상으로 회복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또한 제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라남도 인재육성 장학금은 전공 관련 자격증 서적 구입, 자격증
관련 학원 등록 등 제가 학생으로서 공부하는데 온전한 큰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저의 꿈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여러 실패 경험과 비교로 무너져있던 저의 자존감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전라남도 인재육성 장학금이란 ‘회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